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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학 & 사상

삶-다행이라는말


다행이라는 말

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
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
아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
날 때
나는 눈을 감아버렸다

돈을 건넨 적도 없다
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리며 얼른 그
곳을 벗어났다
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
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
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

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
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
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톡톡 털며 천천히
일어났다

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

자,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 년을
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
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, 내려앉
았다

놀라워라! 배신감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
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
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
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

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 넣
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짓
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
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
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, 다
행이다

-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/천양희-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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